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인 전투 (문단 편집) === 전사자 수만 명 설 === 용인 전투의 결과 3만이 남았다고 하는 설. 8만명설에 따르면 5만이 죽은 셈이고, 5만명 설에 따르면 2만이 죽은 것이 된다. 출처는 역시 조선 왕조 실록. >검토관 최상중(崔尙重)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군사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양식이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며, 장수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신이 보건대, 임진란 때 용인(龍仁)에서 이광(李洸)이 싸울 때 우리측 군사가 거의 8만 명이나 되었으니, 그후 굶어죽거나 적의 칼날에 죽은 자가 비록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가 3분의 1은 넘을 것으로 3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남 지방 사족(士族)의 집은 노자(奴子)가 10여 명이 넘는데, 이처럼 국사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노자를 다 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집에서 2명 ∼ 3명씩만 내어도 5만 ∼ 6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사의 숫자가 부족한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ㅡ 선조 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8일 계사 2번째 기사 그런데 검토관은 정6품 관직의 [[문관]]으로 주로 임금에게 경서를 낭독하고 논평하는 일을 주로하는 직책이다. 즉, 군사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3만이 남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못해도 3만은 남았을 것이라고 최상중의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와키자카가 이끌던 병력은 본래 수군[* 수군이라도 일본의 수군은 어디까지나 접선해 백병전을 주 임무로 했으므로 장비나 숙련도가 육군과 다를바가 없다.]이었으므로 장수를 제외하면 말이 거의 없었다. 천명 좀 넘는 일반 보병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다해도 기병까지 합류한 수만을 섬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대로 와키자카기에서도 수급 천여개와 포로 200이라고 적혀있으니 수만을 몰살시켰다는 건 말이 안된다. 마지막으로 위 선조 수정 실록 26권에도 나와있듯 일본군은 근왕병을 추적하지도 않았는데, [[경기도]]가 무슨 [[나폴레옹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동토 [[러시아]] 땅도 아니고(용인 전투는 한여름인 7월의 일이다), 전라도까지만 도망치면 얼마든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데 수만이 굶어죽었다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